할아버지의 가다마이
안녕하세요, 저는 해진입니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있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오늘 괜히 양복을 입고 왔습니다. 제가 위아래로 갖고 있는 딱 한 벌 있는 양복입니다. 양복을 입을 때마다 저는 제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러니 양복을 입고 온 김에 저희 할아버지 얘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대학 비진학자입니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만 나오셨습니다. 본인이 원치 않았지만 사정이 생겨 비교적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긴 노년기 동안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자주 양복 차림이었습니다. 가다마이를 입고, 넥타이도 즐겨 맸습니다. 그렇게 차려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셨어요. 뭘 사지도 않는데 미장원, 꽃집, 과일가게를 들락날락하며 이웃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심지어 직업이 따로 없으신데 혼자 명함을 파서 사람들을 만나면 건네주었습니다. 명함에는 역시 양복 차림인 할아버지의 사진이 박혀있었고, 동네 노인회 회장, 아마추어 서예대회 우수상 같은,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이력이 적혀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직업은 없고 나이는 많은 자신을 남에게 그대로 드러내기 싫어서 양복으로, 또 명함으로 자신을 감싸고 싶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복이나 명함 같은 생활의 요소 하나하나가 할아버지에겐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려웠을지도 모르죠. 사회가 인정하는 직업도, 능력도, 학력도 없는 자신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여겨질까 봐서 말입니다. 자신을 설명할 좋은 이름이 없으니 할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명함을 나눠주고 다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에 저도 양복까진 아니어도 가다마이를 입고 출근할 때가 많습니다. 직장에서 정갈한 차림새를 요구해서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복장은 자유롭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는 반팔 티셔츠 하나 입고 출근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다마이를 걸치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까지 신고는 합니다. 그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봅니다. 옷차림새라는 어설픈 허울. 그 안온함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봅니다. 또 저는 명함도 있습니다. 대부분 업무로 만난 사람에게 명함을 주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쓸데없이 명함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명함이라는 그 작은 종이로 제 보잘것없는 존재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봅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지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저 자신이 능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듯한 학력이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제 모습을 의식해서일 겁니다.
오늘 수능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도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 친구는 수능을 보는 날 1교시 국어 시험이 마치자 그 다음 시험은 보지 않고 시험장을 나왔다고 해요. 국어 시험만 풀었는데도 이 성적이면 자기가 원하는 대학을 못 갈 것 같았다고 합니다. 대학 입시가 이 친구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까지는 수능 국어 시험 80분이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수능이, 그리고 대학 입시가 요구하는 능력은 아주 한정돼있으니 말입니다. 수능 과목은 국어, 수학, 영어, 탐구 정도이고, 수시 원서를 넣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학교생활기록부 몇 장에 쓸 수 있는 정해진 능력만이 입시에서 쓸모 있는 능력으로 인정받습니다. 정해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철저하게 소외됩니다.
그러니 오늘 수능을 보지 않고 대학에도 가지 않는 이들 중에서는 더욱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수능을 보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입시 원서도 한 장 넣지 않았습니다. 대학입시가 요구하는 정해진 능력이 제게는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제가 너무나 무능해보여서, 대학입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대학입시가 요구하는 능력이 없을 때 입시의 문턱 앞에서, 사회의 문턱 앞에서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무능한 사람일까요.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없는 이들은 정말 무능한 사람일까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저는 저희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퇴직하시기 전 마지막 직업은 필경사였습니다. 손으로 서류에 글씨를 써 넣는 직업입니다. 인쇄기술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시기에, 표창장이나 상장 같은 각종 서류를 손 글씨로 쓰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필경사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손 글씨만 적당히 잘 써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할아버지의 손 글씨나 붓글씨는 늘 멋이 있었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이미 필경사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드문 시대였습니다.
언뜻 보면 저희 할아버지는 무능한 사람 같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이었고. 글씨는 잘 썼지만 사무실마다 대형 프린터기 쓰는 시대에 손 글씨는 돈이 안 되는 능력이었고. 말년에는 일정한 소득과 이렇다 할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저희 할아버지는 절대 무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들기름을 넣어 말아주신 간장비빔국수는 늘 맛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꾼 텃밭에서 딴 고추나 고구마도 늘 맛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띄엄띄엄 가르쳐주신 붓글씨의 미학은 아직도 제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잣대입니다. 이따금 할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동네를 누빈 덕에 저는 동네 지리를 익히고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제가 배울 수 있게끔 만들었습니다. 대학을 가라고 눈치를 주고 공부를 하라고 호통을 치던 학교에서보다, 초등학교만 나온 우리 할아버지에게 저는 훨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할아버지는 사 년 전에 영원한 안식에 드셨습니다. 장례를 마친 이후 저는 할아버지 댁 곳곳에 남은 물건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 댁 작은 방에 온갖 책이 빼곡하게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책은 다양했습니다. 동양 고전을 비롯한 한문 고서나 주역, 사주명리학, 이름 짓는 법 같은 책도 있었고, 붓글씨 쓰는 교본, 회화 작품을 모아놓은 화집도 있었습니다. 한데, 살펴보니 모든 책에 라벨지로 출력한 글씨로 “이책은해진에게”라고 붙어있었습니다. 한 권 한 권 모든 책에요. 누군가는 그걸 보고 할아버지가 못 배운 한을 제게 풀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책은해진에게”라고 붙은 그 책들을 저는 대학 비진학자가 대학 비진학자에게 건네는 연대의 손짓으로 이해합니다. 사회가 무능하다고 낙인찍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우리는 결코 그들의 말처럼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되뇌는 연대의 언어로 이해합니다.
저는 그런 저희 할아버지를 무능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세상에 분노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할아버지처럼 사회의 틀로 담을 수 없는 재주와 가치를 지닌 모든 대학 비진학자를 기껏해야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대학입시를 비롯해 계량 가능하고 협소한 척도로 사람을 재고 따지는 모든 제도와 체제에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제가 저희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이고, 제가 저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이며, 모든 이가 자신을 자신의 척도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입니다. 더는 양복과 명함의 뒤에 숨어야 하지 않는. 양복과 명함의 권위를 빌려야 하지 않는. 존재들이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대학 비진학자 가시화 주간을 맞아, 소외된 비진학자들에게 존경과 연대의 말을 건넵니다. 감사합니다.